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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도시에 대해 알아보자

 

 

홍콩의 풍경은 맨해튼을 연상시키지만 이 도시는 외제 물건으로 가득 찬 거대한 중국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도시 지역을 벗어나면 시골의 전통적인 평화와 매력을 만끽할수 있는 열대 지역이 나타난다.

 

경제적인 기적을 이룩한 홍콩에는 약 600만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곳은 또한 중국의 오랜 관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의 직할 식민지인 홍콩이 육지에 접해 있는 부분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도시들로 둘러싸여 있다.

 

홍콩은 유랑민들의 안식처이며 영국의 식민지로 동경의 대상이며 상품의 원료를 거래하는 교역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 곳의 주민들은 사업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목적에서 이곳에 왔다.

 

이 도시는 고풍스럽운 옛 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건물은 해외 이주민의 완고함과 식민지의 자부심이 결합되어 세워졌다. 빅토리아 항구에서는 현대식 사무실용 건물과 오래된 중국의 해양 운송선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주장 강 유역 근처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홍콩은 면적이 약 1061km이다. 홍콩은 중국인 특유의 지혜로움과 활기찬 성향이 영국 정부의 비간섭 정책과 결합하여 아시아 대륙에서 주요 산업, 교역, 금융, 관광 중심지의 하나로 성장 하였다.

 

오늘날 홍콩과 중국 사이에는 경제적 정치적인 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지는 않지만 홍콩은 아직도 식량과 겨울에 쓰는 신선한 용수와 동력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서 들여와 쓰고 있다.

 

중국은 천연 자원과 제조품을 홍콩에 판매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홍콩의 주요 사업체를 소유, 운영하고 있다. 영국과 중국 어느 쪽도 홍콩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고 인식하지 않지만 이들은 중국 국경을 틍해 이루어지는 불법 침입자를 막기 위해 상호 협력한다.

 

 

1500년대 부터 포르투갈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지만 1842년 청나라로부터 홍콩 섬을 할양받았던 제 1차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자연항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영국은 이 곳이 중국의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 인도에서 들여온 아편을 교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860년에 영국은 홍콩섬에 면하는 본토의 주룽 반도를 지배했다. 1898년에 영국은 현재 홍콩이라 알려진 지역의 소유권을 완전히 인정받아 99년간 조차하게 되었다.

 

1842년까지만 해도 홍콩의인구는 단지 5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1937년에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이 때에도 피난처를 찾으려는 100만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이 직할 식민지로 이동하였다.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홍콩을 점령하고 있을때 거의 같은 수의 중국인을 중국 본토로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홍콩에는 또다시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 이 곳의 인구는 거의 2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 중국 본토에서 굶주림을 참지 못한 100만명의 피난민이 다시 홍콩을 찾았다. 또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는 베트남의 공산 정권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수천만의 보트 피플이 홍콩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위험을 무릅쓰고 홍콩으로 왔다.

 

홍콩의 번영은 이제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 것 같다. 홍콩의 99년간의 조치는 1997년에 끝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이것이 홍콩 섬과 주룽 반도에 대해 영국이 법적 권리를 유지하는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영국의 통치를 결코 인정하지 않고 영국은 더 이상 중국의 통치자에게 조건을 내세울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홍콩에 대한 조차권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홍콩은 중국의 대회 정책과 방위 분야를 제외하고는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인정받게 될것이다.

 

이 협정은 홍콩이 중국에 양도된다고 해도 적어도 50년간은 어느 정도의 지역적인 독립성과 현재의 경제 체제를 인정할것을 보장한다.

 

그러나 홍콩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은 1997년 이후 중국이 임의로 조약을 해석할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홍콩이 중국 본토에 속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1949년 중국 해안의 자유 항구인 상하이에 대한 공산 정부의 재산 몰수를 기억하고 있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많은 비무장 학생들이 중국 군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사건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많은 홍콩의 주민들은 1997년 이전에 어느 정도 민주적인 조치들이 중국에 정착된다면 상당한 안도감을 얻을수 있겠지만 중국 정부는 홀콩주민들이 기대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지 않다.

 

반면 홍콩에서는 평상시와 같이라는 표어가 유행하고 했다. 항구는 선박들로 가득 차있고 공장은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경마장은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고 부는 여전히 쌓이고 있다.

 

홍콩의 주민들은 그들의 생존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홍콩인들은 중국에 의존하여 계속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듯 중국 또한 홍콩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