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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의 역사와 생활에 대해서

 

 

중국의 남쪽 연안에 위치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해외 속령지로 남아 있다. 이 곳은 주장 강의 많은 지류 가운데 놓여 있으며 일곱개의 구릉이 있는 반도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가 많지 않은 타이파 섬과 콜로네 섬에 둑길로 연결된 마카오의 면적은 작으며 마카오에 사는 약 30만 2천명의 인구 중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이고 주로 포르투갈인이긴 하지만 소수의 유럽인들도 있다.

 

197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이 독립했을때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 가운데 가장 작고 경제적 중요성이 덜한 마카오만이 포르투갈령으로 남았다.

 

당시 중국이 포르투갈에 마카오의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카오는 자각의 자치권을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중국과 포르투갈 두 나라의 국기가 마카오의 평화로운 국경 지역에 나부끼고 있다.

 

매일 검문소를 지나가는 트럭은 오른쪽에는 포르투갈 번호판을 왼쪽에는 중국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이 작은 식민지는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수입해야만 한다.

 

극동 지역에서 무역권을 획득한 최초의 유럽인은 포르투칼인이었고 이들은 1557년에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조차했다. 중국인들은 남중국해 연안의 해적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마카오의 사용권을 주었다.

 

마카오는 곧 이익이 많이 남는 금, 은, 아편, 자기와 비단의 주요 교역항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교역의 중심지로 유명해진 마카오는 또한 동아시아의 예수회 선교단의 본부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마카오의 포르투갈인 총독은 1680년에 임명되었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권한은 포르투갈 이주자들의 관심사와 이익을 돌보는데 지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마카오의 영토와 이 곳의 원주민들에 대한 권한을 유지하였다. 중국, 일본과 인도 사이의 교역에서 주도권을 가졌던 포르투갈은 1700년대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영국이 1841년 홍콩을 점령해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만들자 마카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중국의 국내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마카오를 포르투갈령으로 선포했다. 극동 지역의 사치품의 어음 교환소이며 거대한 교역 거류지였던 마카오는 밀수꾼과 도박꾼들의 천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주인인 중국은 이 지역에서 생기는 외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했다. 포르투갈은 1966년~1969년에 있었던 문화 대혁명 기간에 마카오를 원주인인 중국에 양도하려고 했었지만 중국 공산 정부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양도가 마카오의 보다 중요한 이웃인 홍콩의 끊임없는 성장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까지 영구의 직할 식민지인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조건에 중국과 영국 정부가 합의를 했기 때문에 중국과 포르투갈 사이에도 합의가 이루어져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1999년에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되었다.

 

마카오는 특별행정 지구로 불려지는 사회적 경제적인 체계를 2050년 까지 유지할 것이다. 1989년에 포르투갈은 1981년 이전에 태어난 마카오에 살고 있던 약 10만명 이상의 중국인들에게 포르투갈의 시민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1999년 까지 10만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이러한 해택을 더 받게 될것이다.

 

포르투갈의 시민권은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마카오 주민들에게 안전한 미래를 보장해 준다. 다만 이들이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포르투갈의 여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마카오는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의 주요한 교역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홍콩에게 빼앗겼다. 지금은 직물과 불꽃에 쓰이는 재료의 제조업과 같은 경공업을 통해 수입을 얻고 있으며 마카오로 관광차 방문하는 상당한 수의 관광객들의 도박으로부터 수입을 올리고 있다.

 

관광객들은 두 개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화된 그림 같은 도시와 마주친다. 가톨릭 교회는 포르투갈의 바로크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것이다.

 

상파울루 대성당은 1835년에 일어난 화재로 불타 버렸는데 이 건물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정경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때때로 불교 사당 옆에 있는데 이 사당들은 어부들의 보호자였던 아마에게 헌신한 고대의 사원으로 크리스트교 이주자들은 이것을 후에 마카오라고 불렀다.

 

비록 몇개의 현대식 고층 건물이 마카오의 하늘 위로 솟아 있지만 이 도시는 홍콩과 비교해 볼때 고풍스러운 면도 많이 보존하고 있다.

 

빠른 수중익선을 타고 홍콩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마카오는 아직도 사람을 압도하는 매력과 지중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인력거가 오래된 돌멩이에 꽝하고 부딪치면서 지나가고 옛 도시의 좁은 길을 통과하여 비틀거리며 지나다 보면 이 곳에는 무너져 가는 집과 리스본의 알파마 지역과 비슷하게 꽆을 진열한 발코니가 보인다.

 

그러나 중국어로 된 표지판과 광고물은 동양적인 정취를 풍기며 거리에 문을 연 중국풍의 상점과 장의 사들이 가게에 장식해 놓은 요란한 장식물 등이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