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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라오스는 동남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육지로 둘러싸인 국가이다.

 

이 나라의 북쪽과 동쪽은 중국과 베트남의 산맥들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캄보디아의 저지대 서쪽으로는 타이와 메콩 강을 따라 경계를 이룬다.

 

이 나라는 인종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이해 관계로 분리된 주민들이 드문드문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보다 크고 세력이 강한 인접 국가들의 분쟁에서 라오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몹시 험난한 역사를 갖고 있다.

 

백만 코끼리들의 나라

 

 

지나 티베트 족의 자손으로 오늘날 라오스를 구성하고 있는 인종은 라오족, 타이족, 흐몽족으로 이들은 중국 남서부에서 8백년대에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지역 내세서 캄보디아의 지배자였던 크메르족의 보호 아래 살고 있던 몬 크메르 사람들을 정복하고 몇개의 작은 군주국들을 세웠는데 특히 메콩강에 세운 무옹스와가 유명하다.

 

1353년 무옹스와의 파군 군주는 메콩강 상류를 따라 있던 여러 국가들을 통합하여 란상 왕국(백만 코끼리들의 땅)을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은 효율적인 군사 체계와 행정 체계를 발전시켜 오늘날의 라오스를 이루는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다.

 

1400년에서 1600년대 사이에 미얀마와 시암(태국) 그리고 베트남이 여러 차례 이 나라를 침략하여 싸웠으나 결국은 1694년 한 강탈자가 베트남 군대의 도움을 받아 란상 제국을 점령하였다.

 

왕국이 불리됨에 따라 1713년 이 지역은 북쪽의 루앙프라방과 남쪽의 비엔티안과 참파삭 세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였다.

 

라오스와 인접해 있던 강력한 국가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왕국들을 침략하여 1700년대 말기에는 세 왕국 모두가 시암인이나 버마인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00년대에 시암은 라오스 내에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800년대 후반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인도차이나에서 점차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프랑스와 이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놓고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메콩강 통쪽 영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루앙프라방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1917년에 이르러 이 지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독립과 인도차이나 전쟁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차이나는 공식적으로는 물론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이 땅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일본인이었다.

 

1945년 초반에 일본인들은 모든 프랑스의 관리와 군대를 감옥에 가두고 베트남,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지배자들에게 일본인이 프랑스를 대신하여 지배하는 이들 국가들의 독립 선포를 허용하였다.

 

그 당시 라오스 정부는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여 1940년부터 라오 이사락(자유 라오스)운동을 주도해 왔던 페트사라트, 수나나 푸마, 수파누봉이 이끌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패한후 프랑스는 라오스를 독립 왕국으로 인정하였다.

 

라오스는 독립을 했으나 라오스를 통치하던 세 군주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페트사라트와 수바나 푸마는 프랑스와의 협정 수락을 지지하였으며 수바나 푸마가 왕정 중립파의 지도자로 라오스 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세 사람의 군주 중에서 수파누봉은 북베트남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호치민의 격려와 지원을 받으며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파테트라오 운동을 일으켰다.

 

라오스의 내전

 

 

1954년 베트민의 승리에 이어 제네바 협정은 라오스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였다.

 

왕정주의자들과 파테트라오 세력 사이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960년에 육군 장교인 콩레 대위가 권력을 잡으면서 또 하나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1962년 연립 정부가 구성되어 내전은 끝이 났다.

 

파테트라오 운동의 지도자인 수파누봉과 반공산 주의자인 분움 군주와 수바나 푸마가 주도하던 연립 정부는 1963년 수파누봉의 공산 세력에 의해 무너진다.

 

베트남 전쟁동안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은 라오스 동부를 통하는 호치민 길을 따라 보급품을 수송하여 남베트남에서의 베트남 공상주의자들의 전쟁에 이바지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북베트남과 중공 소련의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태국과 남베트남의 원조와 미공군에 의한 호치민 길과 파테트라오 주둔 지역에 대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1970년에 이르러 비엔티안에 있던 라오스 정부는 단지 라오스의 서부 지방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1971년에 미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남베트남 부대가 라오스 동부를 침공하였으나 수파누봉은 이를 격퇴했다.

 

1973년 초반에 수파누봉과 비엔티안 정부는 정전에 동의하고 수바나 푸마가 이끄는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이 정부는 수파누봉이 장악 하였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공산화되고 캄보디아 마저 공산화되자 라오스의 공산주의자들은 여세를 몰아 라오스의 공산화에 주력하였다.

 

파테트라오는 대규모 시위를 벌여 1975년 11월 사방 바타나 왕을 퇴위시키고 파테트라오 세력이 라오스의 정권을 잡은 다음 날 수파누봉은 라오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게 된다.